화창한 봄날에 해인사 소리길을 찾았다.
해인사 가는 길 계곡 따라 새로 조성해 놓은 길이 참 좋더란 말을 여러 번 들어서 그 길을 꼭 한 번 가 보고 싶었는데 오늘에야 작은 바램이 이루어졌다.
소리길의 소리(蘇利)란 우주 만물이 소통하고 자연이 교감하는 생명의 소리라고 한다.
또, 천 년의 시간을 숨어 지낸 가야산의 마지막 절경으로 그 숨겨진 보물이 긴 침묵을 깨고 수려한 자태의 속살을 드러내는 곳이 바로 이 길이라고 부연설명을 해놓았다.
이름도 예쁜 가야 소리마실을 지나 홍류동 계곡을 죽 따라 올라서 끝까지 가려면 약 7,3km를 가야 하는 제법 먼 길이다.
길 옆 곳곳에 활짝 피어있는 진달래들, 이름 모른 들꽃들과 더불어 여기저기 보이는 산 벚꽃들이 한 폭의 수채화를 연상케 한다.
큰 바위들, 조약돌, 여러 모양의 노송(老松)들과 더불어 계곡 물소리, 바람소리, 새소리로 주변 정취는 더욱더 아름답고 신비롭기까지하다.
쉬엄쉬엄 계곡들을 돌다보니 이 모퉁이 저 모퉁이에서 만나게 되는 상춘객들, 어린애들과 함께하는 가족들 또, 연인들도 다정하게 손을 잡고 지나간다.
나물 캐는 어느 부부는 우리 부부에게 다정한 미소로 손짓을 한다.
황사로 얼룩진 봄날이 마치 어린 시절에 겪었던 아지랑이 낀 봄날 같아 종달새 울음소리가 어디서 들려올 것만 같다.
연분홍 치마를 봄바람에 휘날리며 지나갈 듯한 저 논둑길을 한 무리의 젊은이들이 조잘대며 지나간다.
길은 4구간으로 나누어져 있고 19곳의 명소마다 멋진 한시(漢詩)들의 구절(句節)들로 내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명소의 첫 지점인 경멱원(更覓源)에 도달하니 친절하게도 “무릉도원을 상상하며 가야산을 바라보는 곳”이라고 해설까지 해놓았다.
호젓이 더딘 걸음으로 숲 언덕을 찾아드니
돌무더기 어지러운 구비마다 물결이 부딪히네.
꽃은 지고 새는 우는데 인적은 드물고
구름까지 깊어 예 놀던 곳 알 수 없더라.
걷다 보니 어떤 곳은 황톳길, 오솔길, 노송으로 우거진 숲 길이 나오는가 하면 기암괴석사이로 뚫려 있는 샛길 곳곳에 놓여있는 전망대와 구름다리가 한껏 운치를 더해 준다.
어느 길은 명상하기에 딱 알맞은 곳이 있는가 하면 침묵이 더 좋다는 것을 깨닫기도 해 주면서 어느 구간은 거추장스러운 신발을 벗어버리고 맨 발로 곧장 걸어가고 싶다.
한 낮의 따가운 봄 햇살을 가려주는 오솔길을 아내와 함께 걸으면서 평소에 못다 한 속마음을 서로 주고 받고 칭찬도 해주면서 우리들의 삶을 반추해 본다.
또, 마음을 비워야 하고 이제야 말로 내려놓아야 할 때라는 것을 깨닫게 하는 소리길이 있어 하루가 풍성하고 즐거웠던 나들이었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에는 오늘 같이 이런 멋진 날들이 앞으로 몇 번 더 올까를 생각하니 울적한 마음이 불쑥 든다.
봄은 왔으되 마음은 씁쓸하다고 소리하는 사철가의 가사처럼 어느새 백발의 중노(中老)가 돼버린 내가 이 찬란한 봄에 느끼는 우수(憂愁)의 상념만은 숨길 수가 없구나!
속절없이 지나가 버린 내 청춘처럼 이 봄마저 훌쩍 가버리고야 말겠지!
낙화담을 지나면서 한 송이 꽃처럼 떨어지고야 말 내 운명이란 것을 생각하고 시 한 수 또 음송해 본다.
낙화담(洛花潭)
어젯밤 풍우에 골짜기가 요란하더니
못 가득히 흐르는 물에 낙화가 많아라.
도인도 오히려 정의 뿌리가 남아있어
두 눈에 흐르는 눈물이 푸른 물결에 더 해지네.
2016 대구 문학예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