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택배가 왔다.
겉봉에는 보낸 사람 유혜란 이라고만 적혀있지 전화번호도, 보낸 이의 주소도 없는 이상한 택배였다.
받는 사람은 분명 나였다. 내 이름과 교수란 직함까지, 아파트 동, 호수까지 정확히 적혀있었다.
아마도 나를 빤히 잘 아는 사람임엔 틀림없는 것 같은데 누군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뜯어보니 내용물은 먹음직한 ‘망개떡’이었다.
나는 혹시 이름만 적고 전화번호를 잊어먹고 안 썼을 수도 있겠다 싶어 수첩을 꼼꼼히 뒤져보았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허사였다.
기억에 기억을 더듬어 봐도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의사, 교수로서 지금까지 한두 사람을 만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 제자 중의 하나일까? 직장에 있는 사람? 진료 받은 환자? 아니면 흘러간 여인들일까? 궁금증은 점점 더 증폭해갔지만 해결책은 없었다
그러자니 별별 생각이 다 났다.
유혜란이가 누굴까?
혹시 우리 사이를 이간질하기 위해 변 교수가 장난 친 것인지도 모른다. 변 교수는 종교도 같지만 같은 대학에 봉직하고 형제처럼 지내던 터였다. 워낙 장난질이 심해서 그에 대한 의심이 가시질 않았다.
지난번에도 술 마시다가 마담에게 사주하여 옛날 애인이라고 속이며 나를 곤혹스럽게 만든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 친구가 나를 속여서 무슨 이득이 있단 말인가?
곧 나의 생각은 그가 아니라는 쪽으로 흘러갔다.
그나저나 누구인지 이름이라도 알아야 고맙다고 인사라도 할 텐데 난감하였다.
나를 속이는 그 누구의 짓이 아니라면 도대체 이 사람은 모든 걸 숨기고 왜 떡을 보낸 것일까?
나를 곤혹스럽게 만든다고?
내 나이 70도 넘은 지금, 나의 아내를 추동하여 나를 질투의 늪에 갇히게 할 일도 없는데 어쩌자고 이런 일을 한 것일까?
이런 저런 상념의 나래를 펼치고 있는 순간 문득 스쳐가는 생각이 하나 있었다.
혹시 며칠 전 상냥하게 전화 받던 그 여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불쑥 들었던 것이다.
이 택배가 오기 전, 그러니까 정확히 일주일 전의 일이다.
우리 부부는 포드 차를 타고 다니는데 미국 사람 기준으로 만들어서 그런지 견고하기는 하지만 차체가 큰 게 흠이라면 흠이다.
이 차를 아파트의 좁은 주차장에 주차할 때마다 우리 부부는 애를 먹곤 한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용케도 주차를 잘 해왔다.
그런데 그 날은 아내가 앞에서 안내를 해 줬음에도 내가 옆에 있는 차를 살짝 긁어버렸다.
아주 경미하여 내가 느끼지 못할 정도로 스친 것이다.
그것도 모른 채 그곳에 주차를 하지 않고 딴 곳으로 얼른 가서 세운 후 다시 그곳으로 지나가며 보니 거의 표가 나질 않을 정도이지만 긁힌 자국이 있었다.
다행히 아무도 본 사람이 없는 것 같고 차주인도 누군지 모르고 해서 일말의 불안감을 안고 그대로 집으로 올라갔다.
그런데 몇 시간이 지나서 경비실에서 전화가 왔다.
“혹시 남의 차 긁은 사실이 없습니까?”
“예, 오전에 그랬는데 차주를 몰라 연락 못 했습니다.”
“그러면 이 번호로 통화해보십시오.”하고는 경비원이 전화를 끊었다.
잘못하면 뺑소니에 해당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겁이 덜컥 나서 두려운 마음으로 전화를 걸었다.
전화 받은 사람은 중년 여인의 목소리였다.
오전에 주차하다가 조금 스쳤는데 이제야 전화를 드린다고, 그리고 잘못됐다고 용서를 빌었다.
그런데 내가 걱정했던 것은 일순간의 기우(杞憂)였다.
지금까지 어느 누구의 통화에서도 그녀처럼 매너 있고 상냥하고 교양 있게 전화를 받는 사람을 처음 보았다.
그녀와의 통화 후 내 기분은 뭐라 말 할 수 없을 정도로 상쾌했고 묘한 기분이었다.
그러자 일을 저질러놓은 것이 오히려 행운으로 느껴지기까지 했다.
혼란스러웠던 내 마음은 재빨리 진정되었다.
남편이라는 사람도, 내일 차정비소를 하는 친구에게 수리를 부탁할 예정이니 그 친구가 견적서를 보내 줄 것이라고 점잖게 일러주었다.
그 다음 날 구좌를 알려 와 나는 즉시 송금하였다.
그렇게 해서 차 문제는 원만히 해결을 보았다.
떡 보낸 사람이 누굴까? 하고 의아해하고 있는 중에 언뜻 그 여인이 생각났던 것이 결코 우연한 일은 아니었다.
그날 나는 직장에 가면서 택시를 탔다. 그리고 기사에게 나의 궁금증에 대해 자초지종 얘기를 했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택시 기사는 대뜸 이렇게 맞받아쳤다.
“그 떡은 틀림없이 차주 측에서 보낸 것 같습니다. 틀림없어요! 어느 친구가 이 야박한 세상에 장난으로 그 떡을 유혜란이란 이름으로 보내겠어요?”
그날 저녁 망년회에서 만난 제자들에게 이 이야기를 했더니 일성으로 차 주인이 아니라 변 교수가 장난쳤을 거라고 말했다.
그리고 동료 교수들도 “변 교수가 맞을 것 같네요.”라고 거들었다.
다만 수십 년을 같이 살아온 아내는 “나는 차주 여자도 아니고 변 교수도 아니라고 생각해요!”라고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잠시 나를 의심하는 눈초리였다.
내가 말이 없자 아내는 곧장 고민할 필요 없이 굳이 유혜란이란 사람이 누군지 알아보려면 관리실에 가서 아파트 주민들을 열람해 보자고 강력히 주장했다.
하지만 난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왜 그런 생각이 들었을까?
혹시 나의 기대감이 깨질까 봐 그랬나?
난 종종 어떤 진리에 대해 모르고 사는 것이 좋을 때가 있다고 믿는 편이다.
아무튼 망개떡은 며칠간에 걸쳐 맛있게 잘 먹었다.
하지만 먹을 때마다 궁금증은 되살아난다. 아니 이제 떡을 다 먹고 난 지금도 누구였을까, 궁금증이 증폭한다.
종심(從心)의 나이를 넘어서까지 애인을 둔 사람을 '가문의 영광'이라고 변 교수는 만날 때마다 이야기한다
난 어쩌면 지금까지도 애인이 있어서 마누라 몰래 떡을 보내줬다면 얼마나 시치미 떼고 잘 먹었을까, 하고 생각해 본다.
얼굴 숨긴 혜란 씨, 예쁜 이름같이 얼굴도 예쁠 것 같소이다.
당신은 가끔은 숨기는 편이 들어냄보다 좋다는 것을 익히 아시는 거군요.
인정이 야박할 대로 야박해진 오늘 날, 당신 같은 사람이 있어 이 세상은 더더욱 아름다워지는 것 같습니다.
떡 잘 먹었습니다.
혹시라도 내 글을 읽을지도 모를, 그 누구일지라도 좋을 혜란 씨, 차 긁고 공돈 날리고, 마누라한테 잔소리 들어도 그다지 기분 잡치지 않게 한 혜란 씨,
이 나이에 떡 때문에 마음 설레게 해주어 감사합니다.
그게 아니라면 혹시라도 내 글을 읽을지도 모를 변 교수!
나를 즐겁게 해주기 위해서 장난을 치셨다면 내 용서해 주리다.
당신이 내 마누라 질투하게 하여 나를 골탕 먹이려고 한 짓이겠지만 오히려 난 잠시나마 ‘이게 웬 떡인고?’ 하며 옛 추억을 더듬어보는 행복한 시간이 되었다오.
오히려 감사하오. 당신 같은 장난꾼은 각박한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힘이 있는 것 같네요!
문학예술 여름호 `16
대봉교회보 제 87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