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학정보
고객센터
제목 주당잡기(酒黨雜記)
이름 이정범
작성일자 2019-10-02

술은 우리네 삶에서 중요한 한 몫을 담당해왔다.

심지어는 술을 신의 선물이라고 하면서 종교적인 행사뿐만 아니라 사교적인 모임에서도 빼놓지 않고 등장시켜왔다.

문제는 이 술이 우리의 건강뿐만 아니라 삶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를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보기로 하자.

그리하여 지금까지의 술 문화 중에서 잘못된 것은 바로 시정하고 이 시대에 걸 맞는 새롭고 건전하며 올바른 술 문화를 정립해야 하겠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좋은 술과 좋은 습관이 좋은 인생으로 이끌어주기 마련이다.

 

술은 건배에 의해서 결속되는 사람들의 공동체, 우정, 형제애를 보장하는 상징이 되고 그 확인과 보장의 매개체로서 술의 의미를 가늠할 수 있다.

곧 고대 사회의 제의(祭儀)에서 술잔을 높이 들고 신과 소통하는 제사장의 신성한 행위의 속화된 형태가 건배로 남게 된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결속과 공동체성을 확인하면서 소통의 의미를 갖는 것이 바로 건배가 아닐까?

한편 건배가 종교시설의 종소리처럼 악마를 쫒아내는 의식이라는 설도 있다.

건배 시 술잔을 부딪치는 것은 그때 나는 소리로 마음이 서로 통한다고 믿기 때문이라고 전한다.

그런 점에서 건배사는 오히려 보다 진지해야 하고 그 자리에 모인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의 의미를 부여해주는 그런 말이 되어야 할 것 같다.

동양에서는 때로는 잔을 깨끗이 비운다는 뜻으로 건배라는 단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술이란 좋게 말하면 인생의 동반자요, 나쁘게 말하면 멀리해야만 할 요물(妖物) 같은 것으로 생각하면 무방하다.

탈무드에는 사흘에 한 번 마시면 금이요, 밤에 마시는 술은 은, 낮에 마심은 구리, 아침술은 납이라고 하였다.

팔만대장경에도 술은 번뇌의 아버지요, 더러운 것들의 어머니라고 하였으나 채근담(菜根譚)에서는 꽃도 반쯤 핀 봉오리가 아름답듯 술도 조금 취하도록 마시면 무한한 가취(佳趣)가 있다고 하였다.

그리스 철학자 아나카리시스는 술 한 잔은 건강을, 두 잔은 즐거움을, 석 잔은 방종을, 넉 잔은 광란을 일으킨다고 하였다.

또한 일본의 후쿠자와 유기치(福澤諭吉)는 술은 인간관계의 윤활유라고 하면서 그 맛은 쓰나 인간의 마음을 여는 데는 이 보다 더 좋은 수단이 없다고 하였다.

노르웨이 속담에는 인생은 짧으나 술잔을 비울 시간은 충분하다고 술을 찬양하고 있다.

어느 사회든 술은 문화의 한 형태를 반영한다.

즉 음주문화가 그 사회의 문화수준을 가늠한다고 볼 수 있다.

 

우리네 주도(酒道)는 인간 질서를 존중하면서 인정과 즐거움을 바탕으로 한 푸짐하고 여유 있는 음주관(飮酒觀)으로 이어져 왔다. 그러나 술을 마시면서 대화를 안주 삼아서 술 그 자체의 맛과 멋을 즐기는 사람은 보기 드물다. 외국의 살롱이나 카페와 같이 술집이 대화나 토론의 장소로 이용이 되었더라면 우리 사회가 좀 더 성숙되지 않았을까?

 

술을 마실 때는 수작(酬酌)과 짐작(斟酌), 작정(酌定)이 필요하다고 한다.

수작(酬酌)은 잔을 권하거니 받거니 하면서 흥을 돋우면서 술을 마시는 것이다.

'술을 권해선 안 될 사람에게 술을 권하는 것은 술을 잃어버리는 것이요, 술을 권할 사람에게 권하지 않는 것은 사람을 잃어버리는 것과 같다.' 란 말을 상기하면서 마시는 것도 수작의 요체(要諦)가 될 것 같다.

짐작(斟酌)의 짐()주저하다’, ‘머뭇거리다라는 뜻이 있는 것으로 봐서 상대방의 성격이나 술 실력을 가늠해서 분위기 맞게 권하여 상대의 잔이 비었는지 어느 정도 마셨는지 미리 어림쳐 잘 헤아리면서 술을 마셔야 한다는 것이다.

작정(酌定)은 술 따르는 양(酌量)을 정하는 것으로 무작정(無酌定) 따르다 보면 잔이 넘쳐 무성의하고 상대방을 무시하는 무례한 짓으로 보이게 됨으로 조심해서 술을 따라야만 하겠다. 그래서 강요하지 말고 지나치게 오버하지 말자.

능력에 따라 건강에 맞추어 마시면 되고 대화를 즐기며 우정을 나누면 된다.

서로 격려하고 의견을 존중하는 절제와 품위에서 좋은 분위기를 만들면 좋겠다.

 

술은 최고의 기호음식으로서 알맞게 취하는 사람이 최상의 술꾼으로서 존 헤이(John Hay)는 술은 비와 닮아서 진흙 속에 내리면 흙을 더럽게 하나 옥토에 내리면 그 곳에서 꽃을 피우게 한다면서 처음에는 사람이 술을 마시나 다음에는 술이 술을 마시게 되고 종내에는 술이 사람을 마시게 된다는 것이다.

탈무드에는 악마가 사람을 방문하기에 너무나 바쁠 때에, 그 대리로서 술을 보낸다고 할 정도로 술을 아주 경원시해야만 할 것으로 보았는데 하물며 독주(毒酒)일 경우 에랴!

게다가 유독 폭탄주를 선호하는 우리네 사회인지라 술 때문에 목숨을 잃기까지도 한다.

폭탄주는 왜 빨리 취하는 것일까? 의사들은 맥주에 들어있는 탄산가스가 알코올의 흡수를 촉진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또 폭탄주를 순한 술이라고 잘 못 생각해 많이 마시거나 참석자들로 하여금 '원 샷(one shot)'이 강요돼 빨리 취하게 된다는 것이다.

아무튼 형식의 변화가 어떠하든 폭탄주는 폭탄처럼 파괴적이다.

 

술은 우울증 등 여러 정신건강 상의 문제가 생길 때 증상을 완화하는 역할을 하는 측면도 있고 가벼운 스트레스에서는 유용할는지 모르지만 알코올 자체에 예민한 뇌를 가지고 있는 경우 그 효과가 일시적일 뿐이며 지속· 반복 시에는 사람의 억압중추를 마비시키고 뇌신경계를 교란하여 알코올 의존증 외에도 공황장애, 우울증의 시발점이 되기도 한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두어야 할 것은 알코올에 대한 예민도가 사람에 따라 다르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술을 연속해서 계속 마실 수가 없다. 예민도가 높은 사람은 소량의 술에도 의존증으로 발전하게 된다.

그래서 술을 즐겨도 되는 사람과 안 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도 명심하여야 한다.

안타깝게도 이런 사람들은 금주(禁酒) 이외에 뾰족한 탈출법이 없으며 스스로의 의지 노력만으로 벗어나는 것이 불가능하므로 반드시 주위의 도움을 받아야만 한다.


, 술의 순기능보다 역기능에 대해서 좀 더 알아보자.

술이 과하면 뇌 조직을 파괴하여 인격적 결함을 일으키게 되고 또 간에도 대사기능을 방해하는 지방간의 원인이 되어 간 기능 부전을 일으킨다.

'술이 극도에 이르면 어지럽고, 즐거움이 극도에 이르면 슬퍼진다.' 라는 말이 있다. 넘치면 모자란 것만 못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술을 어느 정도까지 마셔야 옳은가에 대한 정답은 없다. 하지만 즐거움을 넘어 지나친 음주는 건강뿐만 아니라 패가망신하는 지름길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올바른 '음주문화'가 필요하다.

 

조선시대 고산 윤선도(尹善道)의 파연곡(罷宴曲)에서는 술을 마시되 예와 덕이 따라야 한다는 유교적 덕목을 강조한 것을 보아도 또한, 궁중화가 혜원 신윤복의 풍속도에도 술접대를 받다가 감찰에 걸린 별감의 당혹스러운 모습이 잘 묘사되어 있는 것을 봐서도 한잔 술일망정 하늘에 부끄럽지 않게 마셔야 한다는 게 선조들의 주도(酒道)란 걸 엿볼 수 있다.

 

원래 술을 적당하게 마시는 것이 숙취예방의 지름길이다. 보통 남자는 하루 2잔 이하, 여자나 노인은 하루 1잔 이하가 적당하다고 하지만, 때론 과음이 불가피한 경우가 종종 있다.

그래서 과음한 다음날 아침 두통, 근육통, 구역질, 어지러움, 권태감, 무기력증 등의 증상이 나타나기도 하는데, 이를 숙취(宿醉)라고 한다.

술이 과하면 취하게 되고 취하면 알게 모르게 술주정하기 마련이다.

술주정을 하는데도 사람에 따라 다르다. 고성방가 하는 사람, 우는 사람, 술상을 뒤엎는다든지 행패를 부리는 사람, 걸핏하면 남과 싸우는 사람, 술이 들어가기만 하면 제 자랑을 늘어놓는 사람 등등 별별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이런 사람들을 반면교사로 삼아 술이 취하게 되면 나는 과연 어떤 유형의 사람인가를 곰곰이 따져보아서 술을 조심해서 마셔야겠다.

 

술과 함께 웃고 울면서 살아온 우리들, 연습도 복습도 할 수 없는 일과성 인생이지만 술이 있어 즐거웠네! 라고 노래하면서 연신 건배잔을 들어올린다.

'누구나 술을 마시면 곧잘 솔직해지지. 어쩌면 우리는 그 솔직함이 좋아서 흰 눈이 소록소록 내리는 날 밤, 뒷골목 목로주점에 앉아 고기 굽는 희뿌연 연기를 바라보며 술을 마시는지 몰라! 이런 순간들이야말로 인생의 맛과 낭만을 정말 즐길 줄 아는 주당(酒黨), 아니 주선(酒仙)들이 아닐까?









                                                                                                                                                                                         경북대학교 명예교수회지 제 16집

                                                                                                                                                                                          문학예술 2019년

 

 

 

조회수 18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