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항간(巷間)에 회자(膾炙) 되는 “9988 234” 란 말이 있다.
백세 가까이 건강하게 잘 살다가 고통 없이 죽고 싶다는 말인 것 같다.
그러나 그게 바라는 대로 잘 될까?
철인 쇼펜하우어(A.Schopenhauer)는 사람이 늙으면 끊임없이 고통과 권태사이를 오가는 시계추와 같은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헀다.
그렇지만 인생의 황금기는 결코 젊은 시절이 아니고 은퇴 후 10년 동안이 가장 행복한 때라고! 그래서 이 시기를 잘 보내야 한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이렇게 귀중한 황금시기를 훌적 보내버린 내가, 아직도 남아있는 몇 년 만은 정말 후회 없이 보내려고 노력은 하고 있지만 세월은 야속하게도 너무나 빠르게 지나가 버린다.
속절없이 세월을 보내다 보니 인생이 허망하게 생각되고 남는 것은 안타까움뿐이다.
늙음 자체가 병이다(Senectus ipsa est morbus)라고 갈파한 로마 철인 세네카(L.A. Seneca)의 말대로 이 나이가 되니 심신이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른 것 같다.
어떻게 하면 곱게 늙다가 잘 죽을까?
이 궁리 저 궁리에다 온갖 상상력을 다 동원 해 봐도 별 뾰족한 길이 보이질 않는다.
하여, 좋아하는 시인들의 시어(詩語)들 속에서 그 길을 찾아보기로 하였다.
왜냐하면 시인들이야 말로 감수성이 강하고 인생의 적나라한 면을 그대로 말해 줄 성싶기 때문이다.
헷세(H.Hesse)는 사람이 늙으면 마치 안개 속을 거니는 것처럼 모든 것이 흐릿해져 점점 세상과 동떨어져 살게 되다가 종내에는 어둠 속으로 사라져버리는 게 인생이라고 하였다.
끗발 좋고 발랄한 젊은 날에는 뭇사람이 내 주위로 몰려오더니만 인생의 안개가 끼니 하나 둘 다 떠나가 버리고 홀로 이 세상을 살아가야만 하는 고독한 존재, 그것이 곧 나그네 같은 인생의 종착역이라고 절규하고 있다.
반면 여류시인 베이커(W. Baker)가 쓴 “사랑스럽게 늙어가고 싶소!” 라는 시에서는,
험악하고 외로운 이 세상에 살아가면서도 아름답게 늙어갈 수 있노라고 자신 있게 말해주는 멋진 시다.
이 세상에는 오래될수록 더 소중해지고 사랑스러운 것들이 많다고 한다.
예로서 코끼리의 상아가 그렇고 장식하는 레이스(lace), 몇 천 년이 지나도 찬란하게 빛을 발하고 있는 금관들, 그리고 비단 등을 예시하고 있다.
오래된 노거수(老巨樹) 밑에는 신령스러움과 치유가 깃들어 있어 사람들이 복을 빌러 오고,
오래되어서 더 유명해진 도시와 거리들을 사람들이 많이 찾는 것처럼 나이가 들어서도 얼마든지 사랑과 존경을 받으며 살 수 있노라고 읊조리고 있다.
게다가 영국의 계관(桂冠)시인 워즈워스(W. Wordsworth)는 “초원의 빛”에서 더 고무적인 말로 나이 듦을 찬양하고 있다.
싱싱한 풀잎에, 아름다운 꽃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처럼, 젊은 시절이 좋아 보이지만 결코 젊음 따위에 연연(戀戀)하지 않고 차라리 늙을 때가 더 좋다고 찬노가(讚老歌)를 부르고 있다.
마찬가지로 고대 로마의 철인 키케로(Cicero)도 모든 악의 근원 및 쾌락과 탐욕으로부터 해방되는 노후가 더 좋다고 말했다.
나이 들면 인간이면 마땅히 가져야 할 원초적인 정념(情念)들을 더 많이 가지게 되고 젊어서부터 당해왔던 온갖 고난들을 잘 견뎌 냈고 이젠 더 이상 모진 풍상(風霜)들을 겪지 않아도 될 것이라는 안도감(安堵感), 담담히 죽음을 맞을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 그리고 해가 거듭 될수록 점점 더 지혜로워진다는 사실들에 매력을 느끼지 않을 수 없노라고 고백하고 있다.
사무엘 울만(S.Ulman)은 그의 시 “청춘”에서 세월을 거듭하는 것만으로 사람은 늙지 않고 정열을 잃을 때에야 만이 비로소 영혼이 시들고 고민, 의심, 불안, 공포, 실망 이런 것들이 사람을 늙게 하고 정신을 더럽히게 하니, 모름지기 사람은 신념을, 자신을, 희망을 가져야하며 영감이 끊어지고 비탄의 백설(白雪)이 사람의 마음 속 깊이까지 덮고 냉소(冷笑)의 얼음이 이를 굳게 닫게 될 때에야 만이 비로소 사람은 진정으로 늙게 된다고 하면서 늙어서도 꿈을 져 버리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미국시인 프로스트(R. Frost)는 눈 내리는 깜깜한 저녁을 조랑말과 같이 언덕에 홀로 서서 저 멀리 어두운 숲을 조망(眺望)하면서 죽음을 관조(觀照)해 보았노라고 적고 있다.
죽는다는 것은 일변 사랑스럽게 보이고 깊은 암흑의 심연(深淵)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같이 느끼지만 살아서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이 남아 있어서 죽기는 아직 이르다고 작가는 새롭게 마음을 다짐한다.
마지막으로 티즈데일(W.Teasedale)이 죽을 때 읊고 싶다는 기도를 한번 들어보자.
여태까지 살아오면서 채찍 같이 후리치는 매서운 눈보라조차도 사랑하였고 마음에 상처를 남기는 말들도 아랑곳하지 않고 사랑했으되 심장이 찧어질 것 같은 아픔을 느끼면서도 온 정성 다하여 사랑했노라고 외치고 있다.
그래서 마치 어린애들이 이 아름다운 세상에 곡조 부쳐 노래하는 것처럼 사랑스런 이 세상을 찬양하면서 죽노라고 기도드리는, 이런 시인을 내 어찌 좋아하지 않으랴!
아름답고 멋진 시들이 내 앞길을 비쳐주는구나!
이 세상 모든 시인들께 건배!
나의 멋진 노후에 건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