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대학생활 6년간은 참 힘든 시기였다.
거창 촌놈이 대구로 유학 와서 먹고 자는 것은 입주 가정교사로 근근이 꾸려나갔지만 애들 가르치랴, 내 공부 하랴, 등록금 마련하랴, 그야말로 내 형편이 말이 아니었다.
지금 생각해도 그 고된 학창시절을 어떻게 견뎌 냈을까? 하고 내 자신이 참 대견스러워진다.
뮐러(Wilhelm Müller)가 쓴 “겨울 나그네” 중에 "백발(白髮)" (Der greise Kopf)이란 시가 있다.
실연의 고뇌를 참다못해, 진저리나는 젊음이 빨리 지나가버리고 일찍 죽어 버렸으면 좋겠다 라고 절규하는 구절이다. 그 당시의 내 처지와 심정도 아마 이와 비슷하였으리라!
혹시 염라대왕께서 나에게 젊은 시절을 다시 살아 보라고 선심을 베풀어 주시더라도 나는 첫마디에 “싫습니다. 그냥 이대로 살다가 죽으렵니다. 두 번 다시 그 때로 돌아가긴 싫으니깐 요.” 라고 말할 것이다. 한마디로 기억조차도 하기싫은, 몸서리쳐지는 학창시절이었다.
하지만 ‘미숙이’ 만큼은 내 뇌리에서 아직 사라지지 않고 가끔은 즐거운 추억 속으로 나를 빠져들게 한다.
마치 혹독한 눈보라 속에서도 경이롭게도 꽃을 피우는 에델바이스(edelweise)나 노란 복수초가 연상되는 것처럼!
지금은 더 할는지 모르지만, 그 당시의 의대공부란 하도 범위가 넓고 또 어느 하나 소홀히 하면 낙제하기가 십상인지라, 끼리끼리 몇 명이 모여서 그룹(group) 공부를 해야만 했다.
그 와중에서도 가끔 시간이 난다든지 아니면 어느 친구가 여윳돈이 생긴 것을 알게 되면, 가차 없이 향교 근방의 ‘미숙이’가 일하는 술집으로 우루루 몰려갔다. 그 당시, 미숙이 나이가 18세쯤 될까 말까? 얼굴은 예쁘다기보다는 오히려 귀엽고 명랑한 애로서 우리가 가면 마치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반겨 주었다. 그리고 우리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막걸리를 마시면서 희희덕거렸다.
또 당시에는 심야 통금이 있었는지라 어쩌다 통금시간을 넘기게 되면 별 도리 없이 미숙이하고 온 밤을 보내야만 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우리는 참으로 순진했고 착했다. 왜냐하면 누구하나 술 취한 미숙이를 희롱하거나 해코지를 한 기억은 전혀 생각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 당시 친구들은 나를 호칭하기를 ‘까뿟(caput)’이라고 불렀는데 이 말은 라틴어로 우두머리라는 의학용어다. 대장이 매너가 좋으면 부하들도 따르기 마련. 그리고 그 비좁은 방에서 6,7명이 함께 포개 잘라치면 미숙이가 가운데 자고 가위 바위 보로 그 다음 명당자리(?)를 차례대로 정해야만 했던 것이다.
아! 그런 추억의 밤들이 기하(幾何)였던고!
그럭저럭 졸업 후 들리는 풍문에 의하면 미숙이는 마산인가 어딘가에서 버스차장을 한다는 말만 들려 올 뿐, 그 후의 소식은 전혀 알 길이 없다.
빠른 것이 세월이련가? 반세기 이상이 후딱 지나간 지금, 가끔 친구들을 만나면 젊은 시절의 동안(童顔)들은 다 어디로 가버리고 허연 머리에 중늙은이의 얼굴들 뿐, 멋쟁이 웅이는 무엇이 바빴던지 일찌감치 천국으로 가버렸고, 우영이는 서울서 의사 직을 팽개치고 목회(牧會) 중이라나, 그 외의 친구들은 미국의사가 되어 잘 먹고 잘 산다고 가끔 소식들이 온다.
세월은 흘러가고 삶은 바뀌어도 우정만은 변치 않고 어딘가에 숨겨져 있다가 때맞추어 나타나 불꽃같이 내 가슴을 태우곤 하누나!
불현듯 친구들이 보고 싶고 미숙이가 생각나는 오늘.
아! 옛날이여, 아름다운 추억의 편린(片鱗)들이여!
늙어서일까! 아스라이 미련처럼 다가오는 그때 그 시절.
뜬금없이 최백호의 노래로 추억을 달래 본다.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 못 올 것에 대하여, 낭만에 대하여”
문학예술 2015 여름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