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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전령이 나를 일찍 깨었음일까? 새벽녘 희부연 창 밖은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고 온천지가 하얀 세상으로 변해있다. 잘 말려 부풀린 햇솜처럼 희고 탐스러운 함박눈이 이곳 대구에서도 펑펑 쏟아지고 있다니 이럴 수가!
대구에서도 이런 함박눈을 볼 수 있다니! 각 TV방송들도 대구에서 60여 년 만에 큰 눈이 내렸다고 호들갑들이다,
우산을 들고 출근길을 나선다. 간간이 지나가는 차들은 엉금엉금 기어가고 행인들도 조심조심 제 갈 길을 가고 있건만 표정만은 한결 밝은 얼굴들이다. 누구에게 거는 건지 휴대폰을 귀에 대고 깔깔거리는 여학생들, 할아버지가 뒤따라오건 말건 혼자서 신나게 눈 위를 뛰고 뒹굴고 있는 어린아이들. 다소 곧이 우산을 쓰고서 상념에 잠겨서 걸어가는 저 여인은 눈 내리는 그 겨울의 아름다운 추억을 되씹고 있을 게 분명하다!
시끄럽던 도회지가 한결 조용해지고 사그락 그리는 눈 위를 걸어가는 내 마음은 순백의 무아로 빠져 들어가는 이날 아침.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엘가의“사랑의 인사”라도 들려주면서 미소 띤 얼굴로 서로 인사를 나누고픈 아침이다.
살아오면서 쌓아온 미운 정 고운 정들일랑 다 떠나 보내고 눈과 같이 하얀 마음을 가지고 제발 오순도순 살아가라는 하늘의 당부 같기도 하다. 모든 근심걱정 다 내려놓고 오늘 하루만큼은 순백의 하얀 마음으로 살아가라고 하는 하늘의 명령 인 것 같다. 매일 매일 전해오던 소름끼치는 일들일랑 깡그리 다 잊어버리고 저 새하얀 눈송이 같이 혼탁해진 인간의 영혼을 순화시켜주어 순결하고 소박하게 살아가라는 하늘의 다그침인 것 같다.
어느덧 나는 타임머신을 타고 눈오는 날의 어린 시절로 되돌아간다. 그리고 그 날의 온갖 정겨운 추억들을 주마등같이 떠올려 본다.
눈 오는 날에는 이상하게 온 세상의 모든 것이 조용해지고 만물이 휴전이라도 선포한 듯 차분하게 깔아 앉은 것처럼 느꼈던 것은 나만이 가지고 있는 상념일까? 눈 오는 날이면 유독 이리 풀쩍, 저리 풀쩍 정신 없이 돌아다니는 개들은 아마 사람 보다 눈을 더 좋아하는 짐승인 게 분명한 것 같다.
초가 집 처마 밑에 엿가락처럼 주렁주렁 매달려 있던 수정같이 투명한 고드름들, 그 고운 고드름 끝에서는 햇살에 녹아내려 한 방울 두 방울 똑 똑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들. 어느덧 동리 개구쟁이들이 모이면 눈싸움이 벌어지다가 동리 앞 개울가로 우 몰려가서 추위도 아랑곳하지 않고 정신 없이 얼음을 지쳤던 일들. 논두렁 가에 지폈던 모닥불에 옹기종기 모여서 솜바지가 타 들어가는 줄도 모르고 깔깔대던 그 동무들. 지금은 다 어디서 무얼 하는지, 그 친구들이 유독 보고싶고 그리운 이날 아침이다.
푹푹 파이는 눈 위를 걸어 어느덧 경북대 교정을 들어서니 캠퍼스의 모든 나무들은 흰옷으로 단장을 하고 한 폭의 동양화 같은 무대 위에서 장엄한 겨울찬가를 부르고 있는 것 같고 눈을 뒤집어 쓴 넓은 운동장은 젊은이들의 함성과 열기를 식히기라도 하는 듯, 고요와 적막감만 감돌고 있구나!
일렬로 늘어선 푸라타나스 길옆의 나무 위로 까막까치들은 모처럼 펼쳐진 자연의 장관을 놓칠세라 이리 저리 날아다니며 잘도 재잘대는 구나!
대지 위를 쉼 없이 흩날리는 함박눈은 어쩜 저리도 자유분방한지, 노쇠해가고 찌들어 가는 내 삶도 저 눈을 닮아가, 지치고 고단한 내 영혼을 정화시키고 좀더 생기를 불어 넣어주면 얼마나 좋으랴싶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라고 외치며 죽어 간 "희랍인죠르바" 의 니코스 카잔차키스 (Nikos Kazantzakis)의 묘비가 문득 생각나고 그의 고귀한 삶을 닮아 가고픈 이날 아침이다.
이 세상이 아무리 더럽고 추해도 그럴수록 순백의 하얀 마음을 가지고 살다가 사라져간 고귀한 영혼들을 위로해주며 진혼해주려는 하늘의 잔치가 바로 이날 아침인 것 같다.
오늘 저녁은 한동안 소원했던 친구들이라도 불러서 촛불을 밝혀놓고 이 밤을 보내고싶다. 아니면 훌쩍 집을 떠나 정처 없이 먼 곳으로 기차여행이라도 해 볼까나!
눈의 정령, 순백의 혼령이여! 이세상의 더럽고 추하고 보기 싫은 것 다 덮어버리고 씻어야 할 모든 것 말끔히 씻어버려 다오. 더하여 내 마음 속에 도사리고 있는 시커멓고 얽힌 마음들을 깨끗이 정화시켜 눈과 같은 하얀 마음으로 가득 채워 주렴!
눈아, 펑펑 내려라. 펄펄 쏟아져라. 하늘의 씻김굿 판을 맘껏 펼쳐라. 더럽고 추한 잡귀들은 얼씬도 못하게 시리!
그리하여 넬라 판타지아(Nella Fantasia)와 같은 거룩한 노래들이 온누리에 울려 퍼지도록 눈아 자꾸 자꾸 내려라.
대구 기독문학 제 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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