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케는 그의 시“가을날(Herbsttag)”에서 가을이 되어 낙엽이 뚝뚝 떨어지는 날에는 정처 없이 여기저기를 방황한다고 읊조렸다.
나도 올 가을에는 여러 곳을 헤매고 다녔다. 언제 한번 단풍구경을 해야지 하면서도 여태 가보지 못한 곳을, 이전에 가봤으나 한 번 더 가보고 싶은 그 곳으로 그리고, 올해에 유난히 심해진 마음 한구석의 텅 빈곳을 채우기 위하여서 또, 앞으로 이런 멋진 가을을 몇 번이나 더 볼 수 있을까? 하는 초조함 등으로 인해서 일부러 짬을 내어서 길을 나섰던 것이다. 결과로 올해는 많은 단풍들을 구경 할 수 있었고 또, 그들을 보면서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 가을이 가기 전에 사라져갈, 스러져갈 단풍들을 보면서 약한 것, 상처받는 것, 죽어 가는 것에 대하여 한 번 더 생각해 보고 그 의미와 가치를 반추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올해 들어서야 비로소 나는 이 가을을 만끽하게 되었고 많은 것을 보며 즐겼으며 내 생애에서 가장 잊지 못할 뜻 깊은 가을로 기억 될 것 같다. 노귀재를 넘어 경북 청송(靑松)으로 접어들면 차창 너머로 탐스럽게 열려있는 가을 사과들. 차창 문 사이로 손을 죽 내 밀면 닿을 거리에 매 달려있는 사과들. 그
리고 주위의 단풍들과 어울려 멋진 한 폭의 풍경화를 연출하고 있었다. 새로 조성된 청송 댐 주위에 어우러져 있는 단풍들과 햇볕에 반짝대며 찰랑이는 호수도 빼어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산길을 달리는 환상적인 드라이브 코스는 나를 가을의 정취 속으로 푹 빠지게 해 주었다. 팔공산(八空山) 순환도로를 따라 가다 보면 어느 화가들도 감히 흉내 낼 수 없을 것 같은, 차마 나의 둔한 감각으로는 도저히 표현 해 낼 수 없이 감탄만 자아내게 하는 형형색색의 단풍잎들! 오래 만에 찾아 가본 내장산의 곱고 빼어난 단풍들! 고속도로를 벗어나 청도(淸道) 운문사(雲門寺)로 향하는 길에서 만나게 되는 감잎 단풍들과 어울려 파란 가을 하늘 아래에서 수확을 기다리고 있는 빨간 감들을 바라보노라면 메말랐던 나의 감흥이 한꺼번에 용솟음치는 것 같았다.
운문사로 접어들면 산사 입구에 어울리게 만들어 놓은 인도주위에 펼쳐지는 온갖 단풍들 중 샛노란 은행단풍이 상기도 푸른빛을 띠면서 바람에 나부껴 포도 위에 쌓이는 것을 볼 때는 죽음을 앞에 둔 병약한 젊은 여인이 생각났다. 은행단풍의 절정은 경산 카도릭대학교 캠퍼스 입구에 도열해 있는 단풍나무에서 우수수 바람에 날리는 샛노란 은행잎들은 마치 때 묻지 않은 젊은 대학생들의 순수와 감성을 살찌우는 데는 이보다 더 좋은 기회가 없으리라 생각되었다. 가을이 되어 기온이 어느 정도로 떨어지면 나무는 엽록소의 생산을 멈추고 잎 안에 안토시아닌을 형성하여 잎들이 붉은 색으로 변하게 된다고 한다. 안토시아닌색소를 만들지 못하는 나무들은 비교적 안정성이 있는 노란색과 귤색의 카로틴 및 크산토필색소를 나타내게 되어 투명한 노랑 은행잎같이 변하게 된다고 한다.
그래서 녹색의 색소가 없어지고 노랑의 색소와 붉은 색의 색소가 형성되고, 이것들이 서로 어울려 여러 가지 빛깔의 단풍을 만들게 된다. 단풍의 빛깔은 동일수종이라도 가용성 탄수화물의 양에 차이가 있어서 단풍들마다 개체변이가 심하게 나타난다고 한다. 붉은 태양의 정기를 받아서 에너지를 만들어 나무의 생명을 지탱하다가 자기의 소임을 다한 후에는 마지막 광채를 발하며 떨어지되 온갖 아름다움으로 치장 한 후 살포시 땅위로 떨어져 새로운 부활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낙엽! 서산에 지는 해가 더 붉고 장엄하게 보이듯이, 떨어지는 낙엽이 더 곱고 아름답듯이, 나의 삶도 나이 들면서 멋진 삶이 될 수는 없을까?
한여름의 잎들의 작용에 의해서 자양분을 공급받은 결과 저렇게 풍성하게 과일들을 익게 한 후 마지막까지도 내년 봄의 새로운 밑거름이 되기 위하여 떨어져 내리는 저 단풍들처럼 나도 이 세상의 소임을 다한 후에는 모든 것을 다 내려놓은 후 자취도 없이 사라져야겠다. 저 샛노란 은행잎같이, 빨갛다 못해 진홍색의 피 빛같이 떨어지는 저 단풍잎처럼, 푸른 감이 빨간 홍시가 될 때까지 끝까지 자양분을 공급해 준 후에야 떨어지는 저 감잎들같이, 나도 나머지 삶을 더욱더 아름답고 건강하게 장식하여야겠노라고 이 가을을 보내면서 한 번 더 다짐 해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