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향은 경남 거창이다. 그 곳에서 초,중,고교를 다녔다.
고향 좋아하지 않는 사람 누구 있으리오 마는 거창이야말로 물 좋고 정자 좋은 그런 곳이다. 정지용시인의 ‘향수’라는 시와 너무나 닮아서 그 시를 좋아하게 되었고, 또 박인수가 불렀던 노래 ‘향수’를 자주 부르곤 한다. 꿈도 고향 꿈을 자주 꾼다. 그리고 시간만 나면 고향으로 향한다.
도시보다 농촌이 좋은 걸로 봐서 나는 영원한 촌놈인 것 같다. 고등학교를 갓 입학하고 얼마 후의 일이다. 나는 그 당시 읍내 동동(東洞)이라는 곳에서 친구 집 부엌방을 빌려 자취를 하면서 학교를 다녔다. 몇 발자국만 집을 나서면 앞으로 조그마한 시냇물이 흐르고 넓은 벌판이 펼쳐지면서 봄날의 아지랑이와 더불어 종달새도 볼 수 있는 그런 한적한 동네였다. 여기서 나는 4년간을 자취를 하면서 학창시절을 보냈다.
쑥들이 파릇파릇 세상 밖으로 고개를 내미는 그런 화창한 어느 봄날로 기억된다. 초등학교 동창생인 두 여학생이 나의 자취방을 방문하였다. 희야 와 숙이었다. 희야는 과수원을 하고 있는 나의 큰 누나의 막내 시누이였고, 숙이는 키가 커서 우리 반의 보스역할을 하면서 여학생들의 몰표로 나를 반장으로 밀어주었던 장본인이었다. 그 둘이서 쑥을 가득 담은 예쁘고 앙증맞은 소쿠리를 들고서 예고도 없이 나를 불쑥 방문하였던 것이다. 적잖이 당황했던 나는, 그들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그리고 손님맞이를 어떻게 했는지 도무지 기억해 낼 수가 없다. 왜냐하면 나는 그 당시 수줍음을 잘 타는 소심한 학생이었기 때문이었다. 또 그 쑥을 어떻게 요리해 먹었는지도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요는 그들이 가고 난 후 알게 되었지만, 그 바구니 속에 편지가 들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쑥 한가운데에 고이 접은 핑크색 편지였다. 떨리는 마음으로 펼쳐 본 편지의 내용은 이은상 작시, 현제명이 작곡한 ‘그 집 앞’ 의 가사가 그대로 적혀 있었다. 오가며 그 집 앞을 지나노라면 그리워 나도 몰래 발이 머물고 오히려 눈에 띌까 다시 걸어도 되 오면 그 자리에 서졌습니다. 오늘도 비 내리는 가을 저녁을 외로이 이 집 앞을 지나는 마음 잊으려 옛 날 일을 잊어버리려 불빛에 빗줄기를 세며갑니다. 한참 사춘기를 겪고 있는 외로운 소년인 나에게 이보다 더 가슴 울렁거리고 충격적인 일이 예전에 또 있었을까? 문제는 이 편지를 누가 썼을까? 였다. 둘이가 나를 골리려고 그랬을까? 아니면........? 그일 이후로 세월은 빠르게 지나, 그 둘은 시집을 가서 아들, 딸 낳고 잘 살고 있다는 소식만 들었지 한동안은 만나지 못했다. 그러나 가슴속에는 그 편지의 사연에 대해서 항상 궁금한 마음만은 간직하고 있었다. 그럭저럭 세월이 지나 우리는 가끔 만났다. 그리고 물어본다. 도대체 그 편지를 누가 썼는가를.......
그 때마다 그들은 가타부타 안고 빙그레 웃음만 지을 따름 얼버무리고 만다. 참 풀지 못할 수수께끼다. 알 수 없는 건 여자 마음이다.
그렇게 해서 몇 십 년이 흘러갔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초로의 60대가 되었다. 그런데 바로 얼마 전, 그 비밀을 알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참 오래간 만에 초등학교 동기생들과 만나 감포 해변으로 놀러갔다. 술 바람에 얼굴이 붉으래 상기된 숙이가 먼 바다를 초점 없이 응시하면서 뇌까리는 말, “정범아, 그 쑥 바구니 말이야, 그 안의 편지 말이야, 희야 짓이야. 그 앙큼한 것, 그 편지를 언제 그 바구니 안에 넣었는지, 나도 모를 일이야! 정범이 네가 말 안했으면 나도 까마득히 몰랐을 거야” 라고 독백처럼 뇌까리는 것이 아닌가? 자기도 그 바구니 안에 편지가 들어가 있을 줄이야 꿈에도 몰랐다고.
그리고 쑥은 같이 뜯었지만 언제 그 편지를 바구니 안에 집어넣었는지를 진짜 몰랐노라고... 그리고 희야 고것이 나이가 어렸어도 고렇게 깜직한 면이 있노라고 독백처럼 일러 주는 것이다. 초등학교 시절, 나도 과수원 누나 집을 자주 들랑거렸다. 어쩌면 희야가 보고 싶어서 누나 집을 자주 찾았는지도 모르겠다. 마음씨 곱고 예쁜 그 녀가 마음속으로 참 좋았던 것이다. 어쩌면 나의 첫사랑일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태까지 내색 한 번 해 본 적은 없다.
지금은 동창회 등으로 해서 우리들은 자주 만난다. 노래도 부르고 같이 부둥켜안고 춤도 춘다. 그리고 혀 꼬부라지는 소리로 재차 물어본다. “그 편지 네가 썼다 메?” 그럴 때면 즉각 강 펀치가 날라 온다.
“야, 정범아, 그런 건 알 필요 없는 기야, 모르고 지내는 기 더 좋은 기야, 자석아"
..................................................................
이 밤의 향기가 나를 더 취하게 만드누나! 오, 젊은 날의 향기여!
대구 기독문학 제13집
대구 문학예술 제12집
문학예술 2020년 봄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