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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나는 기쁨조
이름 이정범
작성일자 2018-10-19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

이사야 123

   

사람은 누구나 잘 살고(well being) 곱게 늙어 가다가(well aging) 잠자듯이 죽고(well dying)싶어 한다. 또 젊게 사는 것을 좋아 하지 늙어지는 것을 싫어한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않는 것이 또한 인생이다. 그래서 시인 사무엘 울만(Samuel Ulman)청춘이란 시에서 늙어도 젊게 사는 방법을 이렇게 말했다. “그러려면 씩씩한 의지, 풍부한 상상력, 불타오르는 정열, 모험심 등으로 희망의 파도를 타는 한 젊게 살 수 있다”.

젊게 산다는 것은 그러니까 젊어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운동을 많이 하고 좋은 것을 많이 먹고 육체적 쾌감을 얻는 일도 아니다. 그저 젊게 사는 정열을 가지고 새로운 모험을 하는 것이다. 나 역시 이 나이에 뜨거운 실버(silver)가 되어 새로운 모험의 길에 나섰다.
 

의과대학 교수직을 은퇴한 후 경북대학교 보건소에서 초빙교수로 8년간 근무했다. 상아탑(象牙塔)에서 젊은이들의 정기를 듬뿍 받으며 근무하게 된 것은 나의 큰 행운이었다. 국내외의 젊은이들을 진료하다 보니 그들에게서 많은 것들을 보고 배웠다. 덤으로 여러 전, 현직 여러 교수님들과 교류하게 된 것도 내게 큰 보람을 안겨 주었다. 보건소 퇴직 후 희수(喜壽)의 나이에 요양병원엘 취직했다. 평소에는 요양병원하면 별로 마음에 내키진 않았었다. 그러나 이 나이 들어 일 할 데라곤 요양병원에라도 갈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늙어도 의사라고 대우를 해주고, 당직은 물론 중환자 진료를 안 해도 되는 것은 또한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사람들은 현재의 요양병원이 옛날 고려장 (高麗葬)’과 같은 곳이라고들 말한다. 그러나 실제 근무해보니 시설도 예상외로 좋았고 의료진들도 환자중심의료를 펼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거의가 치매 환자들이 대부분이지만 말기 암에다 골절로 불구가 된 환자들도 예상외로 많았다. 생각해보니 형편 상 집에 거주 할 수가 없다면 몸을 의탁 할 곳이라곤 이런 시설 밖에는 없을 것 같기도 하다. 어느 노인은 병원에 도착 즉시, 입원하기 싫다면서 가족들을 닦달해 그대로 돌아가 버리는 환자도 있었다. 아마 부모님과 상의도 안하고 무턱대고 모시고 왔지 않나 싶다. 심지어 어떤 할머니는 억지로 병원에 끌려왔다고 억울하고 분해서 눈물을 흘리며 딸들을 원망하는 경우도 있었다.  


현재까지 가지고 있던 고정관념들을 죄다 버리고 진료에 임하니 점점 애착심이 생긴다. 할 일이라곤 환자 입,퇴원시키는 것 외에 하루 두 번의 회진에다 차트 정리가 고작이다. 다만 수기로 진료 일지를 적는 대신 컴퓨터로 처리하는 종이 없는 차트(no paper chart)라 조금은 힘들기도 하다. 그러나 나는 날이 갈수록 환자들에게 점점 연민의 정을 느낀다. 과거에는 없던 내 자신, 이것은 또한 무슨 의미인가? 그것은 아마 나도 언젠가는 이 환자들과 같은 신세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일 게다. 그런 생각을 하니 마음도 쓸쓸해지고 일말의 두려움마저 생긴다. 동병상련의 같은 마음가짐으로 진료를 할수록 이분들에게 연민의 정은 더욱 더 깊어진다. 어떨 때는 무심결에 환자들의 두 손을 덥석 잡고 마음이 뜨거워져 놓지 않을 때도 있다.  


어떻게 하면 이 환자들을 기쁘게 해 줄 수 있을까? 이런 나의 정감이 환자에게로 바로 감정이입(感情移入)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나의 모습을 유심히 살피던 간호사가 나에게 귀띔을 해 준다. 침대에 그대로 누워 용변을 보는 환자들의 똥 묻은 손과 악수한 손은 잘 씻어야 한다고. 그러나 그게 뭐 그리 대단한 문제가 되겠는가! 이들도 한 때는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청운의 꿈과 희망을 가지고 살아왔을 것이다. 그러나 얘기치 못한 어느 날 이런 처지가 될 줄은 몰랐을 것이다. 참으로 알 수 없는 게 우리들의 운명이자 인생살이인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해보면 희망이라곤 없이 누워 있는 저 환자들에게 친구가 되고 말동무라도 돼 줘야겠다는 생각이 더욱 간절해진다.  


톨스토이의 명작 안나 카레니나에서 톨스토이가 자신의 분신처럼 그려냈던 레빈이라는 인물은 312장에서 이런 고백을 한다. “만일 선이 이유를 갖고 있다면, 그것은 이미 선이 아니야. 만일 그것이 결과를, 즉 보상을 갖는다면, 그것 역시 선이 아니야. 따라서 선은 원인과 결과의 사슬을 초월해 있어.” 나는 물론 레빈이나 톨스토이처럼 사상이 선으로 무장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나는 이 말에 매우 큰 감동을 받았다. 지금의 나를 생각하면 지난 날 남들의 존경을 받고 선을 베풀던 시절이 떠오른다. 그리고 편안한 노후를 즐기던 대학 보건소의 생활과도 비교된다. 그때 나는 충분히 보상 받는 의사였다. 하지만 지금 원인과 결과 없이 찾아온 여기 요양병원의 자리는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라는 하나님의 명령처럼 느껴진다.


나는 호스피스(hospice) 역할에 충실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들의 기쁨조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이들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기쁨의 샘물을 흠뻑 마시도록 해주고 싶다. 세상에서 버려진 것 같은 아픔을 안고 고통과 염려 속에서 괴로워하는 저 힘든 영혼들을 위하여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사랑과 기쁨을 듬뿍 주는 일이다. 풍부(豊富)와 궁핍(窮乏)을 모두 경험한 후 인생일체의 비결을 배웠던 바울처럼 나도 환자들을 진료하면서 인생의 진수를 알게 하시고, 희수의 나이에도 인생 제4막을 열어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

서산에 넘어가는 낙조(落照)가 유난히 빛나고 아름다운 것처럼 나에게도 인생의 낙조를 만나서 저 힘들고 가여운 환자들에게 나의 마지막 정열을 나눠줄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은 분명 그 분이 내게 주신 가장 큰 선()이다.


                                                                                                                                   대구 경북 문학예술 제 14호  

                                                                                                                                   대봉교회보 생명나무 2020 봄

                                                                                                                                   대구 기독문학 2021

                                                                                                                                   경북대학교 명예교수회지제2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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